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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마을의 갈옷 만들기
 
이선애 수필가   기사입력  2016/09/11 [14:37]
▲ 이선애 수필가    


나는 일상에서 갈색을 대하면 현란했던 마음이 잔잔하게 가라앉곤 한다. 갈색하면 농익은 밀밭이나 향긋한 커피빛깔, 도록에 나오는 그림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갈색을 띤 가구는 아무리 오래 두어도 그 중후한 질감에 싫증이 나지 않는다.
갈옷은 제주도에서 어부들의 낚시 줄이나 그물 테가 질겨지도록 그것에 감물을 염색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이 옷의 좋은 점은 비를 맞아도 달라붙지 않고 방부재 성분이 있어 썩지 않고 빳빳해서 풀 먹일 필요도 없고 질겨서 작업복에 쓰여 왔다고 한다.
지난 가을 친정 시골집에 가서 J씨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이고 감물 들이는 작업에 들어갔다. 온통 새파란 나뭇잎에 푸른 땡감이 가려 조그마한 감을 따려고 하니 목 줄기가 아파 온다. 그러나 나는 마냥 기쁘고 즐겁기만 했다. 할 수 없이 땅에 떨어져 있는 땡감을 줍기로 했다. 광목 세 필을 물들이려니 세 자루 정도 감이 있어야 한다. J씨와 나는 온 마을을 샅샅이 뒤지다시피 감을 주웠다.


무성한 진초록이 풍성히 담겨 있는 고향의 늙은 감나무 밑을 서성인다. 한 여름의 단단한 심장을 지닌 땡감, 늦가을에 황금빛 색을 내는 관능의 몸짓을 바라보면 황홀하다.
옆집 감나무 밑에 가 서 있으니 올해 사고로 세상을 떠난 친구 사진이 쓸쓸히 마루에 걸려 있다. 봄이면 연하디 연한 새순의 눈부심, 감꽃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땡감이 떨어지고, 익은 감도 떨어지는 것처럼 순서 없이 떠나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닌가.
그리고 겨울의 나목을 바라보면 한없는 애잔함이 깃든다. 보이지 않는 땅속 깊은 곳에 뿌리가 엉켜 수액을 빨아올려 푸른 열매를 맺게 하는 결정체를 바라보면 신비로움을 느낀다.
폐가가 된 빈터에는 내 유년이 깔려있다. 정다운 어린 날 친구들의 노래 소리가 환청이 되어 들려온다. 감나무 위에 올라가 기차놀이 하며, 감꽃을 엮어 목걸이를 만들던 재미, 땡감이 아깝다며 소금물에 삭혀서 먹던 일, 벌레에 물렸을 때 땡감을 으깨어 발라주시던 할머니의 손길이 너무도 그립다.


온통 옷에는 감물이 얼룩져 그 옷을 입지 않으려고 떼를 쓰던 나의 모습을 생각하면 쓴웃음이 난다. 그때는 내 손으로 감물 들여 옷 해 입을 것을 상상도 못했다. 왁자지껄했던 햇살 좋은 마당은 온데간데 없고 오늘 잡초만 무성하다. 까치마저 저만치 비켜 가며 서성댄다.
폐가에 쌓인 먼지는 여간한 인기척에 미동도 않는다. 허물어진 토방을 바라보니 인생살이가 한낱 꿈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떨어져 있는 감을 한 알 한 알 주워 담으니 지난 세월이 회한의 비수가 되어 가슴이 저려 온다. 까치밥을 남겨 놓은 마을 사람들의 인정, 그 까치밥의 미학을 생각하면 자연의 자정自淨력이 샘물처럼 솟는다.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도 이 마을을 오래 지키셨지만 세상을 떠난 후 동구 밖 늙은 감나무만이 묵묵히 지키고 서 있다.
땡볕에 달궈 낸 세월이 쌓이는 소리, 상처가 에이는 아픔이 천에 밴다. 빛은 천 속 깊이 들어가 자연스런 색을 사정없이 드러낸다. 빛의 교접에서 차츰차츰 붉은 갈색을 드러내는 천을 바라보니 경이롭기만 하다.


온통 감물에 배어 여름의 습기를 말리려는 나의 몸부림이 눈물겹다. 집 근처에 여기 저기 널려 있는 광목천이 바람에 날리며 장관을 이룬다. 해질 무렵 천을 거두니 청산처럼 숨 쉬는 늙은  감나무의 진한 향이 묻어난다. 베옷 서걱거리는 소리에 한없는 그리움들이 교차된다. 행주, 걸레, 수건에 온통 감물이 묻어 얼룩덜룩하다. 감물은 며칠 동안 따가운 햇살에 곱게 물들어졌다. 그 후 감물들인 천으로 몇 가지 옷을 만들었다.
가을날 갈옷을 입고 산사를 찾았다. 단풍색깔과 잘 어울려 오래 나의 모습을 담고 싶어 사진도 몇 장 찍었다. 서늘한 나뭇잎을 어루만지며 가을 정감에 푹 젖어 보았다.
갈옷을 입고 길을 걷노라니 지나가는 낯선 이가 제주도 갈옷이냐고 물어본다.
나는 수많은 돈을 주어서도 살 수 없는 고향의 갈옷이기에 옷을 입을 때마다 정갈하게 입고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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