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하고 외부에 나가서 경제활동을 하지 않은 채 지낸 지 1년이 다 되어간다. 모든 직장인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공무원이나 회사생활을 하는 경우, 거의 비슷한 시기에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직장을 여러 곳에 옮겨 다녀도 건강하게 생활했다면 60살 언저리에 직장생활을 그만두게 되어있다. 나는 20대 초반 설레며 일을 시작하면서 정년퇴직할 때까지 건강하게 근무하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생활했었다. 20여년 정도 열정 충만하게 일했고, 그 이후 10년 정도는 중견의 선배로서 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며 여유있게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에 부쳤었나 보다. 30년 넘게 같은 일을 하다 보니 이전의 열정도 식고 같이 일하는 젊은 사람 속에서 점점 소외되고 있다는 느낌이 생기면서 정년이 되기 전 조기 퇴직을 염두에 두게 됐다. 정년을 꽉 채우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자유롭게 직장생활 동안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하고 재미있게 놀며 쉬며 남은 세월을 보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정년을 6년을 남겨놓고 올해 초 퇴직했다. 주변을 둘러보면 회사에서 희망퇴직을 강요받거나, 정년퇴직을 한 뒤 할 일이 없어 생활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을 종종 본다. 아직 공부를 마치지 못한 자식이 있거나, 국민연금을 수령할 나이가 되지 않아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취업을 생각해야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또 그런 부분이 해결되지 않아 자신의 존재감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는 듯하다. 나는 감사하게도 아직 배우자가 직장을 다니고 있고, 자녀도 장성해 무엇보다 스스로 일을 그만두겠다며 희망퇴직을 선택했으며 계획대로 놀며, 쉬며 날짜만 보내고 있다.
사람들이 나 같은 사람을 `백수`라고 한다. 따라서 어떻게 백수생활을 잘 해야 하는가가 나에게 남은 인생과업이다. 나를 만나면 주변에서 "백수 생활은 할 만한가? 백수 된 소감은 어때? 백수 원년에 과로사 한다. 스케쥴과 사람 관리를 잘해야 행복한 백수생황을 영위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같은 말을 하도 많이 들어 백수에 대해 사전을 찾아보았다.
白手 - 白手乾達(백수건달)에 쓰는 말로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백수`의 한자는 이 글자이다. 손에 아무것도 없이 놀고먹는 건달이라는 의미이다. 백수의 사전적 의미는 만 19세 이상의 성인이면서 대학생, 대학원생, 병역 이행 중이 아닌 사람 중에서 직업이 없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현대에 와서는 돈 많은 백수는 부러움의 대상이고 예전에는 여성은 직업이 없는 경우가 보통이어서 백수는 남성적 의미가 많아 나 같은 여자 백수는 `백조`라고 하기도 한다. 아마 백수의 手 대신 새(鳥)를 사용한 듯하다. 그런데 白이 재미있는 글자이다. 흰백은 희다는 뜻과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있다. 중국어에 白費란 `뭘 했는데 헛수고 했다`는 의미로 쓰인다. 경상도 사투리에 `백지 공부했다, 백지 만났다`는 말이 있는데 이건 쓸데없이 헛수고 했다는 의미다. 그래서 `백`이란 글자가 참 재밌다.
태어나서 25년 정도 일을 가지기 전에 준비기간이 있었고, 30여년 정도 일했고, 건강하게 평균수명으로 산다면 앞으로 25년 정도 더 보내야 한다. 수명이란 게 사람마다 상황이나 조건이 다르고 몇 년 차이는 나겠지만 대부분 비슷할 것이다. 삶의 초창기 25년이 남은 삶의 55년을 준비하는 기간 이어서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았다. 그렇게 살다가 이제 나머지 55년을 보내는 중인데 남은 25년을 어찌 보내야 할지 지금부터 잘 설계해야 할 것 같다. 내가 태어난 것은 `백지 태어난 건` 아닐 것이다. 일하는 인간도 됐어야 했지만, 이제 잘 노는 인간이 돼야 하는것도 내가 태어난 이유일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