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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 에세이>가물치를 낳은 목련나무
 
윤송정 시인 시산맥 회원   기사입력  2024/04/03 [16:34]

▲ 윤송정 시인 시산맥 회원  © 울산광역매일

 비싼 수험료를 치르고서야 뜨끔한 세상맛을 볼 수 있었다. 학업도 중단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한다며 황소고집을 피웠다. 부모님이 한사코 만류하시던 이유는 늦게야 깨달았다. 사랑과 젊음만 있으면 사막에서도 살 수 있다고 믿던, 세상 물정 백치,현실감 없는 순애보의 애정관이 결국 가족과 나에게 붉은 생채기를 남겼다.

 

 -직장이 있어야 결혼을 하지 

 

 부모님의 걱정스러운 말씀이 있었지만, 남편의 평소 인품이나 성격을 봐서 막노동해서라도 가정은 이끌어 갈 것이라 믿었다. 지금 생각하면 콩깍지가 단단히 씌웠던 것 같다. 신앙처럼 믿었던 사랑이다.

 

 결혼식 치루고 몇 달 지나지 않아 남편은 양가 부모님들이 애써 마련해준 약간의 사업자금과 새 둥지처럼 작은 신혼집을 친구 빚보증으로 뜬구름처럼 날렸다. 고생을 모르고 자라 맘만 여리고 착해 빠진 남편이 가정을 파탄의 위기에 몰아넣은 첫 실수였다.

 

 소설로만 읽던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순간이었다. 신혼의 단꿈도 잃은 채 우리는 달동네 쪽방 촌으로 밀려났고 순식간에 당한 봉변이라 나는 살아갈 의욕조차 잃었다. 결혼반지와 아끼던 패물들이 하나둘 생활비로 날아갔다. 

 

 하지만 제일 견디기 힘든 것은 의논 한마디 없이 일을 저지른 남편에 대한 분노와 불신이었다. 전부를 의지하고 기대어 왔던 벽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 버린 심정이었다. 어떤 설명도 사과도 들려오지 않았고 무너진 신뢰감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아 서로 갈등만 심해졌다. 쪽방 촌 언덕배기에 맨발로 서 있는 겨울나무처럼 춥고 허허로웠다.

 

 첫아이를 가져 어쩔 수 없이 친정에 내려와 해산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따뜻한 부모님의 품이 그리웠고 위로를 받고 싶었다. 그때의 친정 형편은 아버지 병환으로 많이 기울어진 상태여서 집 한 칸 없이 고모 집 아래채를 얻어 넷이나 되는 어린 동생들과 부모님이 같이 생활하고 계셨다. 하지만 만삭의 몸이 비바람 피할 최후의 보루는 그 곳뿐이었다. 남편은 부모님 얼굴 볼 면목이 없기도 했지만, 빚쟁이들에게 쫓겨 내 옆에 머물 수조차 없어 떠돌이처럼 밖으로 돌았다.

 

 고모는 내가 맘 놓고 지내도록 뒤 곁 창고 방 하나를 치워 찢어진 창호지 문을 바르고 온돌을 뜨끈하게 데워 주었다. 

 

- 아직 젊디젊으니 얼마든지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눈비 오고 바람 불고 그러다가 다시 날이 들 것이다. 경험으로 생각하고 희망의 끈을 놔서는 안 된다. 

 

 고모와 어머니는 번갈아 가며 나를 격려했다. 또 남편이 밉더라도 그만 이해해 주라면서 나를 달래셨다. 까만 기미가 소복하게 끼어 야위고 초라해진 내 얼굴을 쓸어 보시던 어머니는 돌아서 눈시울을 닦으셨다.

 

 그 밤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느림보 완행열차에 종일 서서 흔들리며 내려왔어도 들창 너머 높이 뜬 만월을 바라보며 결코 만만치 않을 나의 미래에 두려운 생각까지 엄습해 왔기 때문이다. 불현듯 여고 시절 밤새워 읽었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주인공 스칼릿을 떠 올렸다. 윤리적인 삶의 자세는 결코 아니지만 전쟁 통에 모든 것을 잃고 고향 땅 타라를 지켜내는 칡뿌리처럼 강인하고 억센 삶의 열정만큼은 부러웠고 오뚝이처럼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그녀 용기만은 감동적이었다.

 

 -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것이다. 동감이 가는 말이다. 부모님의 기대와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장녀인 내가 여기서 무너진다면 부모님도 무너질 것이고 나의 가정도 무너질 것이다. 실패는 한 번으로 끝내야만 했다. 패배는 결국 비굴과 자책과 허무만 안겨줄 뿐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주먹이 꽉 쥐어졌다. 

 

 - 강해져야 한다. 퇴로가 없다. 극지에서는 오기의 뿔이라도 우뚝 세워 운명과 맞서는 수밖에 없다. 

 

 그 뿔이 부러져 피가 허공에 솟을지라도 뒷걸음질하지 않기로 나는 나에게 약속했다.

 

 친정은 당시에 대구에서 변두리 만촌동에 있었다. 기와를 굽는 굴이 많아 기왓골이라고도 불렀다. 산이 많은 오지여서 의사도 산파도 없었다. 위급한 순간이 와도 병원에 갈 이동 수단마저 여의치 않아 천명을 기대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우리 어머니의 어머니들은 밭 매다가도 아이를 낳았다는데... 

 

 - 난 할 수 있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고 꼬박 열 시간 넘게 시든 난산 끝에 건강한 아들을 얻을 수 있었다.

 

 힘든 고비는 그때부터였다. 난산을 한 데다. 입덧으로 못 먹고 스트레스를 받아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은 한 발자국도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다리에 힘이 빠져 일어서질 못했다. 젊은 나이에 불구가 되고 마는가? 더럭 겁이 나 울기도 많이 울었다. 지금 생각하니 칼슘과 영양이 모두 빠져나가 허깨비처럼 기력을 잃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당황하지 않고 미역국과 쌀밥을 소반에 정갈하게 차려 하루에도 대여섯 차례씩 내 오셨다.

 

 이상한 것은 때마다 미역국에 비린내가 심하게 났다. 역겨워 토악질을 하면서도 밥그릇을 다 비웠다. 살아야겠다는 각오로 꾸역꾸역 먹었다. 그 해 겨울은 거의 누워 지냈다. 무려 석 달이 지나서야 푸른 싹이 움트듯 다리가 조금씩 가벼워지고 근육이 오르기 시작해 한 발 한 발 걸음을 뗄 수 있었다.

 

 - 애야 뒷마당에 목련이 만발했다. 

 

 어머니가 미역국을 챙겨다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나는 무심코 뒤란 목련 나무 아래로 다가가서 그만 깜짝 놀라 못 박히고 말았다. 갈색 고무대야에 어른 팔뚝만한 등 검은 가물치 네댓 마리가 꿈틀거리며 엎드려 있었다. 미역국에서 늘 풍겨오던 비린내의 출처를 그제야 알게 되었다. 

 

 비린 것은 만지지도 먹지도 못하던 어머니가 저 미끈등한 것들을 끓는 솥에 들여보낼 때, 성난 가물치 펄쩍 날아올라, 죄지은 듯 가슴 떨렸으리. 비린내는 얼마나 역겨웠을지... 

 

 - 세상에서 제일 높고 귀한 국과 밥을 주셨네요. 어머니, 이제 저의 다리는 막 초록 도화선에 불붙인 수목처럼 물올랐습니다. 아무 걱정 마시고 지켜봐 주세요

 

 만개한 목련이 무수한 꽃비를 떨구고 있었다.

 

 이후 지금까지 단 하루도 나는 나에게 한 약속을 잊어 본 적 없다. 자존심을 깡그리 뭉개버리던 배고픔도, 남루함도 결코 잊지 않았다. 바닥까지 친 실패의 경험이 없었다면 세상 물정 캄캄한 우리 부부는 무엇이 소중한지 몰랐을 것이고, 부부 사이의 가장 중요함은 애정보다 신뢰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그 소중한 것들을 단단하게 지키지도 못했을 것이다. 다시 태어난 심정으로 우리 가족은 지금 살아간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소중한 하루하루는 태양이 있기 때문이고 태양은 곧 내일의 꿈인 것이다. 

 


 

 

대구출생

시인시대등단

2021년 대구문화재단 경력 예술인 지원 수혜

대구문인협회회원, 서울사이버대학 문예창작학과 졸업

2021년 시집 『기린과 부츠』 천년의 시작 출간

이메일 thdwjd7755@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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