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문학관을 다녀왔습니다. 전날 밤 제법 내린 첫눈 때문에 걱정했는데 다행히 길은 녹고 창밖 설경은 감탄을 불러냈습니다. 문학기행 동행 예정이었던 문인 중에 몇 명이 갑자기 참석하지 못한다고 하여 아쉬웠습니다.
목포문학관은 시원하게 푸른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갓바위 문화타운에 위치해 있습니다. 문학관 주변으로 박화성, 김현 등 문인들의 문학비, 시화를 전시한 야외갤러리가 먼저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목포문학관에 들어서니 1층에 우리나라 사실주의 연극을 완성한 극작가 차범석관, 우리나라 여성 소설가로 최초로 장편소설을 집필한 소설가 박화성관이 있고, 2층에 우리나라 평론 문학의 독보적 존재인 문학평론가 김현관, 우리나라 연극에 근대극을 최초로 도입한 극작가 김우진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또한 작가들의 육필 원고, 유품 등을 전시한 상설전시관 외에도 문학인 사랑방, 문학 창작실, 문학 체험관, 수장고를 갖추고 있습니다.
차범석관은 친필원고, 대표저서, 작품 속 소설 공간 및 작가가 사용하던 서재와 안방 등을 복원해서 전시하고 있으며, 색이 누렇게 탈색된 전원일기 원고도 전시되고 있습니다.
박화성관 역시 친필원고, 대표저서, 작품 속 소설 공간 및 작가가 사용하던 서재와 안방 등을 복원 전시하고 있습니다.
김현관은 친필원고, 생활 유품 등 생전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작가의 방과 지인들이 그려준 김현의 모습, 김현 문학을 엿볼 수 있는 검색대 및 어록 등이 있습니다.
김우진관은 희곡, 시, 소설, 평론 등의 친필원고를 비롯해 5개국 대사관의 서기관을 역임한 아버지 김성규의 유품도 함께 전시되어 있습니다.
차범석은 1924년 전남 목포 출신으로 195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밀주」가 가작으로, 다음 해에 「귀향」이 당선됨으로써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63년에는 극단 `산하`를 창단하고 20년동안 대표로 활동하며 한국의 현대극을 정착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한국적 개성이 뚜렷한 사실주의 연극을 확립하는데 공헌한 대표적인 극작가이자 연출가입니다.
박화성은 본명이 박경순으로 1903년 전남 목포 출생으로 한국 최초의 여류 소설가입니다. 이광수의 추천을 받아 1925년 조선문단에 「추석전야」로 문단에 데뷔했습니다. 1932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장편소설 「백화」를 동아일보에 연재했습니다. 이후 1985년 「달리는 아침에」 이르기까지 팔순을 넘어서까지 왕성하게 창작활동을 하며 60여년의 문단활동에서 장편 17명, 단편 62편을 비롯해 수필과 평론 등 방대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김현은 본명은 김광남이며 1942년 전남 진도 출생으로 8세에 목포로 이주했습니다. 1962년 서울대 불문학과 재학시절 자유문학에 문학평론 「나르시스의 시론-시와 악의 문제」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했습니다. 많은 독서량과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문체로 비평을 독자적인 문학 장으로 끌어올린 최초의 비평가로 평가받으며 240여 편의 문학평론과 저서를 남겼습니다.
김우진은 1897년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 11세에 목포로 이주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목포로 귀향하여 시 50편, 희곡 5편, 소설 3편, 문학평론 20편을 남겼습니다. 그는 기성문단을 훨씬 뛰어넘은 선구적 극작가였으며 특히 표현주의를 직접 작품으로 실험한 유일한 극작가였습니다. 해박한 식견과 외국어 실력, 선구적 비평안을 가지고 당대 연극계와 문단에 탁월한 이론을 제시한 평론가이며, 최초로 신극 운동을 일으킨 연극 운동가입니다. 그런데 애정 문제로 번민 끝에 1926년 8월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과 일본에서 귀국하던 중, 함께 현해탄 바다로 몸을 던졌습니다.
젊고 미혼일 때와 결혼하고 아들까지 낳은 뒤에, 똑같은 사건을 보는 시각이 천지 차이로 달라져서 흠칫 놀라곤 합니다. 김우진 관에는 특히 아버지 유품도 함께 전시되어 있어서 더욱 마음이 아팠습니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충격적인 일을 겪고, 그 부모는 얼마나 상심한 채 남은 삶을 힘들게 살아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문학관을 나온 뒤에, 평소에 말수가 적고 점잖으신 선배 문인께서 `삶의 찬미` 노래를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전원 환영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사의 찬미` 마지막 부분을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좋다~!`로 수정해서 부르셨습니다. `싫다`를 `좋다`로 바꿈으로써 `삶의 찬미` 노래가 된 것입니다. `사의 찬미` 반의어로 흔히 쓰는 `생의 찬미`라는 말 보다 더욱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래 나에게 주어진 삶을 찬미하면서 열심히 사는 거야!` 문학기행 여운이 깊게 남을 듯합니다.